6 June 2025, Noblesse
Portrait (KO)
선율에 새긴 시가
예술과 인문학,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현대음악과 연극, 설치미술의 교차점에서 독보적 작업 세계를 구축해온 하이너 괴벨스.
하이너 괴벨스 1952년 독일에서 태어난 작곡가이자 연출가, 예술가다. 대표작으로 대형 오케스트라를 위한 ‘대리 도시들(Surrogate Cities)’(1994),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초연한 ‘부름의 집(A House of Call)’(2021) 등이 있고, 20년 동안 기센 유스투스-리비히 대학교 응용연극연구소 교수로 재직했다.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카셀 도쿠멘타를 비롯해 파리 퐁피두 센터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통찰하고 고요한 울림으로 감각을 깨우는 하이너 괴벨스의 작업은 전통적 서사와 연출 방식을 벗어난 새로운 형태로 예술의 사유적 힘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현대음악 · 연극계 거장인 괴벨스가 한국을 찾았다. 부산현대미술관의 〈부산현대미술관 다원예술_초록 전율〉(4월 12일~6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MMCA 다원예술 2025: 숲〉(7월 14일~8월 10일)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2011년 통영국제음악제와 LG아트센터 공연 이후 14년 만에 열리는 한국 전시입니다. 부산과 서울 두 전시 모두 인간과 생태의 관계성을 다룬 다원예술의 형태로 진행하는데, 이에 대한 작가님의 관심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1970년대에 정치 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즉흥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제 초기 음악적 표현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태적 인식은 중요한 주제가 되었죠. 이번에 한국에서 진행하는 두 프로젝트도 인간과 자연, 예술의 관계를 고찰한다는 점에서 그 오랜 작업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과 연극,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복합적 예술 세계를 구축해왔습니다. 작가님의 다학제적 접근법의 기조가 궁금합니다. 저는 모든 것에 음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어부터 움직임, 이미지, 소리 등에까지 말이죠. 이것을 바탕으로 매체 간 연결성을 모색하고, 위계적이지 않은 다성적(多聲的)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제 작업의 핵심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상호작용을 탐구합니다. ‘소리와 침묵, 움직임과 정지가 어떻게 서로를 완성하고 내러티브를 형성하는가?’ 이런 질문은 저에게 항상 유효하게 다가옵니다.
문학과 철학적 요소를 종종 작품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출품작과의 연결성을 바탕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부산현대미술관에 전시 중인 ‘물고기는 땅 위에서 걷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The Fish will have to Learn to Walk on Land)’는 2019년 콜롬비아에서 선보인 장소 특정적 설치 퍼포먼스를 재해석한 신작입니다. 작품 제목은 콜롬비아의 대문호이자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말을 차용한 것으로, 마그달레나강의 흐름과 지형 변화, 생물 연구를 통해 인간이 자연에 개입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일 ‘겐코-안(Genko-An)’ 시리즈는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에서 비롯합니다. 그의 에세이 〈월든(Walden)〉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1998년 동명 작품의 요소들과 소로의 일기를 예술적으로 해체한 존 케이지(John Cage)의 ‘빈 단어들(Empty Words)’(1974), 다양한 민족학적 음성 기록,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의 목소리를 결합합니다.
답변에서 문학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저는 문학을 사랑합니다. 문학은 예술적 진실을 품고 있고, 언어와 리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죠. 단순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넘어, 스스로 떠오르는 그림을 그리고 마음속에서 울리는 언어를 듣는 행위가 예술이라고 한다면, 문학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문학적 텍스트 혹은 아이디어를 작품에 반영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간과했거나 모순되는 면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가령 소로의 경우, 그의 관찰법은 냉철하고 기록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모순적인 면이 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면서도 모든 것을 철저히 목록화하고 관리했습니다. 이렇듯 모순적인 면을 통해 저는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고, 작품 속에서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각적 경험으로 전달할 때, 관람객이 스스로 내면의 질문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술이 단순히 메시지와 의미를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질문을 제기하는 매개체로 기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순을 발견하고 감각적 경험으로 확장해나간다는 말씀이 굉장히 인상적인데, 이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모순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우리 관점을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 필요하죠. 제 작업은 예술 간 경계를 허물면서 동시에 모순과 대립을 내포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감정을 느끼고, 이것이 단순한 해석을 넘어 다층적이고 다면적으로 확장될 때, 예술이 제공하는 깊고 복합적인 감각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개하는 ‘겐코-안’ 시리즈는 일본 교토에 있는 사찰 겐코안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에서 비롯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전에 여러 국가에서 이 프로젝트를 선보였는데, 서울 버전은 어떻게 구성되나요? 겐코안은 정원의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착안해 저는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의 다채로운 측면을 조망하는 음향적 경험, ‘목소리의 정원(Garden of Voices)’을 구상했습니다. 서울에서 공개하는 ‘겐코-안 03062’는 세밀한 소리, 빛, 영상으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작품으로, 앞서 언급한 케이지를 비롯해 로베르트 루트만(Robert Rutman)의 목소리가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소로의 〈월든〉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루트만이 어린 시절 월든 연못(Walden Pond)에서 수영한 경험은 그의 삶 속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생생히 증언하는 것이죠. 그 외에 이전 ‘겐코-안’ 시리즈를 진행한 독일, 프랑스, 러시아, 콜롬비아에서 수집한 소리도 포함됩니다. 소로의 관찰자적 태도, 케이지의 우연성, 루트만의 접근법 등 자연과 인간 그리고 소리가 얽힌 복합적 이야기를 통해 관람객이 ‘목소리의 정원’에서 자신만의 청각적 사색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목소리의 정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요. 하나의 주제나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관람객 각자의 해석과 경험을 초대하는 다층적 공간이 바로 ‘목소리의 정원’입니다. 다양한 소리가 서로 얽힌 정원에서 관람객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고유한 감각적 여정을 경험함으로써 예술의 해방적이고 개인적인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와 경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작가님 작업에선 침묵이나 정적 역시 소리만큼 중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침묵의 힘은 소리만큼이나 강렬합니다.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을 내포한, 상상과 기억을 투영할 수 있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죠. 의도적으로 배치한 침묵의 순간은 관람객에게 여백과 여유를 선사합니다. 이전 답변과 이어지는 부분이지만, 저는 관람객과의 관계를 비위계적으로 설정합니다. 해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각자 고유의 해석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겐코-안 03062’에서 03062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우편번호입니다. 이 같은 장소 특정성도 작가님 작업의 특징 중 하나인데요. 무언가를 새로 발명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이미 존재하는 조건을 발견하고 반응하며 변형시키는 것이 제 관심사입니다. 특정 장소의 역사, 소리, 문화적 층위를 작업에 편입해 그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하는 거죠. 예술은 항상 그 장소와 맥락 안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하고, 단순히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교감하고 새롭게 구축되어야 합니다.
기술과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 다양한 기술을 현대미술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러 시대를 지나온 예술가로서, 이러한 변화가 작가님의 표현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나요? 기술 발전은 작업 과정에서 새로운 도구와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어요. 제 작업은 여전히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춥니다. 기술적 측면에선 또 다른 차원으로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예술이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여전히 공감과 연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곡가이자 연출가, 예술가로서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커리어를 되돌아볼 때 전환점이 된 프로젝트나 작업이 있다면요? 여러 번 전환점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혹은 재앙적인 상륙(Ou bien le Débarquement Désastreux)’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무대 위 권력관계를 탐구한 이 작업을 통해 저는 공연이 단순히 서사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비판적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블랙 온 화이트(Black on White)’에서는 음악가의 순수한 매력을 탐구하며 음악과 퍼포먼스의 본질을 성찰했고, 이후 ‘대리 도시들(Surrogate Cities)’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협업해 도시라는 주제를 음악적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슈티프터스 딩게(Stifters Dinge)’에서는 인간 공연자가 없는 공연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기도 했죠. 이 모든 순간이 예술적 지평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 자신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제 모든 삶과 작업은 단 하나의 조건으로 귀결됩니다. 바로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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